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불법이었던 적이 있다. 성냥갑에 작게 인쇄된, 홀딱 벗은 새하얀 나체의 여성은 그 보수적인 유교에 얽매여 있던 고매하신 분들께는 충분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예술이냐 포르노이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외설적으로 다가오는가 아닌가와 같은 주관적인 기준만이 작용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다양한 판례를 살펴보면 (포르노에 대한 정의는 항상 논쟁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미 무궁무진한 판례가 있다) 예술로서 인정받은 매체는 포르노가 아니다. 그 외설적인 소재보다도 예술적 선례를 먼저 인정하기 때문에 성기나 성행위 장면을 묘사했더라도 그것들은 작품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술이냐 라는 주제로 또 한참을 설전을 펼칠 수 있겠으나, 고야의 마하 작품들을 이제서야 감히 예술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자는 없기에, 그것은 확실히 단순한 야한 그림이 아니라 예술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 당시 –고야가 그림을 그리고 활동하던 시기- 에도 그렇게 인식되었을까? 그것은 또한 생각해볼 문제다. 실제로 고야의 그림,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 두 점을 소유하고 있던 한 고매하신 귀족께서는 혼자 집에 있을 때에는 옷을 벗은 마하 그림을 즐겁게 감상하다가 손님이 오면 부랴부랴 옷을 입은 마하 그림으로 바꿔 치기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 예술 작품이 현재와 같이 예술로써 적절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얘기는 또 비단 고야의 나체 그림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늘 그렇듯이 예술의 사고는 그렇게 다른 예술로, 영역으로 계속 확장된다. 신화와 성경에 빗대어 그렸던 예술로 일컬어졌던 수많은 여성의 누드들은 그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과연 사람들은 그것을 신성시하게만 받아들였을까? 너무 하얗다 못해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벌거벗고 이리 저리 춤을 추고 갖은 포즈를 취하는, 그 모든 그림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방패 뒤에 숨어서 즐겼던 추잡한 욕망이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마네의 올랭피아가 공개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은 웬 창녀를 그렸다며 그를 비난하고 모함했다. 결국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의 추한 욕망이 만천하에 또렷이 공개되는 것이었다. 마네는 이러한 욕망들을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인물이나 신화의 인물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여성들을 그렸다. 고야는 실제로 존재하는 마하를 모델로 누드화를 그렸다. 이렇게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의 욕망을 꿰뚫어 보며 그들의 궤변을 지적하고 까발려 버린 누드 작품들이 어떻게 감히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1. 얼음 같이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는 자기가 낸 세가지 수수께끼를 모두 알아맞힌 왕자와 결혼하겠다고 굳게 맹세합니다.



2. 많은 왕자들이 투란도트에게 청혼했지만 끝내 문제를 풀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3. 투란도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왕자 칼리프는 공주와 결혼하기로 결심합니다



4. 공주는 첫 번째 문제를 냅니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개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 그것은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에 되면 죽는다. 












왕자: 그것은 '희망' 



5. 두번 째 문제를 냅니다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며,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갛다. 












왕자: 그것은 '피' 



6. 세번째 문제 

그대에게 불을 주며 그 불을 얼게하는 얼음.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그대는 왕이 된다. 










왕자: 그것은 바로 당신, '투란도트'!



7. 수수께끼를 다 풀었지만 투란도트는 여전히 결혼을 거부하고, 칼리프는 자신의 이름을 새벽녘까지 알아낸다면 투란도트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8. 투란도트는 칼리프를 연모하던  류를 통해 이름을 알아내려고 하지만, 류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9. 류의 슬프고 헌신적인 사랑과 칼리프의 열정에 투란도트는 칼리프에게 마음을 열게되었습니다



10. 투란도트는 말합니다. 칼리프의 이름을 일아냈으니 그건 바로 '사랑'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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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벽에 귀를 대고 있습니다.  그녀가 귀를 대고 있는 벽에는 갈라진 균열이 보입니다. 벽에 귀를 대고 있는 것일까요? 벽에 틈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옆집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궁금해하는 같습니다.

그림 창문 밖을 보면 아직 환한 대낮인 같습니다. 밝은 대낮에 여인은 이웃집에 직접 찾아가지 않고 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림은 19세기 영국의 대표화가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작품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주로 활동한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신화와 전설에서 얻은 영감을 사실주의적인 섬세함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아름답고 몽환적인 색채로 유명한 그의 작품은 신화를 가장 신화적으로 표현한 화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Thisbe – 티스베라는 이름의 그림은 자세히 보면 여인의 볼이 발그레한 것을 있습니다. 왠지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이네요.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 되는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합니다.

 

오래 , 바빌로니아에는 준수한 청년 '피라모스' 아름다운 여인 '티스베' 살았습니다. 서로 집에 살고 있던 그들은 자연스레 왕래했고, 사랑의 꽃을 피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반대하던 양가 부모님은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고, 눈빛과 작은 몸짓으로만 사랑을 속삭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녀를 무엇이 막을 있으랴. 그들은 사이의 벽에 틈이 곳을 발견했지요.

벽에 한줄기 균열은 사랑의 밀어를 속사이는 통로가 되었고, 통로를 통해 서로의 숨결을 나누기만 하는데에 지친 그들은 결국 도피를 결심하게 됩니다.

세상 만물이 고요하게, 낮게 깔린 새벽에 마을에서 떨어진 왕릉 근처의 뽕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 그날이 다가오고, 티스베는 베일로 얼굴을 가린채 뽕나무 아래에서 피라모스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입가에 시뻘건 피가 묻은 사자가 나타나고, 두려움에 질린 티스베는 베일이 땅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바위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자는 베일을 물어뜯어 피를 묻혔고, 순간 도착한 피라모스는 그의 연인 티스베가 사자의 이빨에 목숨을 잃었다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님아 칼을 들지 마오. 슬픔에 사로잡힌 피라모스는 칼을 들어 자신의 심장을 찔렀고, 바위 뒤에 숨어 있던 티스베는 피라모스를 찾아 나섰고, 자신의 베일을 손에 쥐고 자살한 피라모스를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 티스베 또한 사랑하는 남자와 영원한 길을 떠나기 위해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야 맙니다.

 

젊은 청춘은 그리 성급한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성급함으로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훗날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파리 생활을 마친 후 아를에 도착한 빈센트 반 고흐는 별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9월, 론 강에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렸다. 고흐에게 있어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은 동경의 대상이자 꿈의 나라였다. 빈센트 반 고흐가 주고받았던 서신들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밤의 효과’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별을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곤 했고, ‘캄캄한 어둠이지만 그조차도 색을 가지고 있기에’ 밤을 그렸다. 론 강에 서있던 그는 빛이 투영된 물 속의 그림자와 찬란한 별빛에서 미적 의미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밤하늘 속 별들은 꽃과 같은 모양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강의 물결에서는 단단하고 두꺼운 물감의 질감을 느낄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이는 코발트 블루의 분위기는 강렬하다. 또한, 자연의 빛과 인공의 빛을 결합하고자 했던 고흐의 의지는 도시 속 노란 불빛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평가 루이 반 틸보르그는 이를 보고 “하늘에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창조하기 위하여 전경의 땅을 축소시킴으로써 이 작품 속에서 ‘무한의 공간(하늘)에 대한 은유’를 창조했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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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센트 반 고흐는 고향 네덜란드와 비슷한 분위기의 프랑스 남부지방 아를(Arles)에 매료되었다. ‘습지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이 지역에서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쾌청한 날씨와 광활한 평야 위로 작열하는 태양은 그에게 ‘영원함’이었다. 고흐는 이 풍경을 배경으로 씨 뿌리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자 하였다.

  작품에서 온화하게 빛나는 아를의 땅은 쟁기질되어 있다. 고흐가 이 주변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또 다른 작품인 <쟁기질을 끝낸 밭>에서 동일한 배경을 볼 수 있으나,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특히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그림을 선택한 고흐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다. 씨를 뿌리는 행위는 복음주의적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를 통해 고흐가 예술행위를 못 다한 목회자의 길을 표현했다고 해석 가능하다. 고흐에게 있어 그림은 세상을 이롭게 만들기 위해 씨를 뿌리는 행위와 같은 선상에 놓인다.



  한편, <씨 뿌리는 사람>은 고갱이 고흐에게 온 첫 날부터 그려진 작품이다. 고갱의 도착이 고흐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고갱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어가려 노력했던 고흐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이다.







"내 작품 속 인물은 모두 바보 같다. 그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강요된 듯한 부자유스러움과 어색함이 숨어 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무 생각도 없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곧 내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나아가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화면 가득 찬 핑크 빛 얼굴은 우리의 핑크 빛 미래에 대한 것이려나?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가 당장이라도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중화인민공화국 출신 회화 작가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기개와 패기에 잠식당하는 것만 같다. 그것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독 중국 작가들이 서양에서 더 잘나가고 주목 받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오만 뻔뻔함과 넘치는 자신감에 사람들은 얼마나 현혹되는 것은 비단 아시아인 뿐이 아니라 전세계 공통일 것이다.

그 주체할 수 없는 패기 덕에 중국 작가들은 사회 비판적인 그림을 많이 그린다. 현실에서 말로는 할 수 없는 분노와 고통들을 방언처럼 캔버스에 쏟아낸다. 그 비판들은 냉혹한 현실에선 받아들여질 수 없을지언정 예술로써는 충분히 떠받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붓을 쥐고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보여도, 사실은 얼마나 화가 났는가.


웨민쥔의 그림은 그러면 어떠한 분노인가?


절대 웃을 수 없는 이 사회에서 껄껄 웃는 사람들을 화면 가득히 그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품을 거듭하며 인물들의 표정은 점점 과장되게 되었다. 아무도 아니었던 인물들은 어느새 작가 자신이 되고 있었다. 냉혹한 사회를 향해 아무 말도 던지지 못하니, 약간은 체념으로, 또는 약간은 미쳐서 신나게 껄껄대는 모습은 그것이 진정한 웃음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관람자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어 캔버스에서 애써 시선을 피하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웃음 시리즈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슬플 때 억지로 웃는 것만큼 또 슬픈 장면은 없을 것이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 창세기 11 1-9

 



많은 풍속화를 그렸던 브뤼겔의 그림 중에 바벨탑은 유독 전혀 다른 아우라를 뽐내고 있다. 소소한 인물들과 그들의 삶에 집중하는 다른 그림들과 달리 바벨탑은 그 견고한(하지만 무용한) 모습의 거대한(하지만 우스꽝스러운) 건축물 아래 인간들은 미미하며 하잘 것 없다는 인상을 그린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얼마나 덧없으며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던가. 같은 언어를 쓰며 욕망조차 같았던 과거의 인간들은 탑을 쌓으며 그 탑을 통해 최고가 되겠다는 헛된 망상을 펼친다. 그건 희극이었고, 결과는 비극이었다. 서로 말이 다르게 되자 모두 얌전히 집에 돌아간 것 또한 잘 짜여진 코미디이다. 결국은 모두 남의 탓으로 치부해 버리며 쉽게 포기해 버렸던 나약한 인간들! 브뤼겔은 이 모든 것을 너무도 담담하고 얌전히 화폭에 옮기고 있는데 그 조용히 코미디를 설명하는 그의 그림마저 하나의 각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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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날 악마는 모든 것을 밉고 나쁘게 보이게 하는 거울을 깨뜨려 지상에 뿌렸습니다


2. 깨진 거울 조각은 마침 정원에 있던 카이의 눈에 떨어지게 되고, 카이는 절친한 친구 그레다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3. 길에서 혼자 놀던 카이는 눈의 여왕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겨울왕국에 가게 됩니다


4. 마을에서 없어진 카이를 찾아 그레다는 길을 떠나게 됩니다


5. 그레다는 까마귀의 도움으로 이웃 왕국으로 갔지만 카이를 찾지 못합니다


6. 이를 불쌍히 여긴 이웃나라 공주는 그레다에게 마차를 내어주지만, 그레다는 도둑을 만나게 됩나다


7. 도둑들과 친하게 된 그레다는  그들이 내어준 순록을 타고 겨울왕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8. 한편 겨울왕국에서 눈의 여왕과 함께 보내던 카이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차가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9. 겨울 왕국에 도착한 그레다는 마침내 카이를 찾게 됩니다


10. 그레다의 따뜻한 키스를 받은 카이는 다시 따뜻한 마음과 기억을 되찾게 되고, 둘은 다시 마을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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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뭐하세요?”

빈 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찬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높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술고래를 보고 어린 왕자는 물었다.

술 마시고 있지.”

술고래는 몹시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술은 왜 마셔요?”

어린 왕자가 그에게 물었다.

잊어버리려고 마신다.”

술고래가 대답했다.

무얼 잊어버려요?”

어린 왕자는 술꾼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부끄러운 걸 잊어버리려고 그래.”

술고래는 고래를 떨구며 대답했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그를 돕고 싶은 어린 왕자가 물었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럽지!”

술고래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값싸지만 매우 독한 술을 앞에 두고 두 남녀가 앉아있다. 그들은 연인 이려나?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그들은 애써 서로의 존재를 외면하며 애 먼데 시선을 돌린다.

우린 뭔가를 축하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너무 슬퍼서 다 잊고 싶을 때도 마신다. 술을 마시면서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 내가 왜 힘든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없는 의문 자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찰나이다. 그 잠시간의 망각이 끝난 뒤엔 더 큰 죄책감과 괴로움이 우릴 덮칠 것임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반짝하는 찰나에 취해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남자는 모른다. 이제 곧 현실의 고통보다 더 큰 수마가 닥칠 것임을. 멍하니 있는 찰나의 평온은 곧 지나가며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온전한 절망과 좌절뿐임을.

여자는 알고 있다. 이 술을 넘기면 올 망각은 그저 순식간임을. 지금의 이 고통은 그 순간이 지나간 뒤에 배가 되어 자신을 짓누를 것임을. 그런데도 자신은 탁자 위의 압생트를 홀홀 단숨에 넘겨 버릴 것임을


 

 

그림 속에서 한 사람은 돌을 운반하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깨고 있다. 돌을 깨는 작업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화폭에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두 일꾼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담아, 붓으로 담은 ‘사진’같다. 현장감과 사실감으로 이 그림은 현실 그대로의 재현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 전시 당시(1850년) 사람들의 미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예술의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작품 속에 소재로 고귀한 귀족이나 신화적인 인물 대신 평범한 일꾼을 쓴 것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던 시대에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화폭에 재현한 쿠르베는 그야말로 그 시대의 혁신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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